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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인생을 가르쳐 준 분들

삼척시사회복지협의회 0 8,197 2013.01.22 11:13

푸른 하늘이 높은 가을이다. 백년만의 가뭄과 폭염으로 그동안 한 번도 쓰지 않았던 선풍기를 밤마다 돌려야만 잠을 청할 수 있던 불면의 밤은 온다 간다 말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 땅에서 일곱 번째로 맞는 풍요한 계절, 가을이 왔다. 하늘은 가없이 푸르고 내 마음도 창공 높이 두둥실 떠가는 흰 구름에 얹는 즐거운 날들이 흐른다. 생각해 보면 감사한 일이 너무도 많다. 유년과 학창시절, 인생의 황금기인 20대 청춘을 깡그리 저 북녘 땅에 묻고 새 삶을 찾아 대한민국의 품에 안긴 7년 세월...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혈혈단신으로 새로운 터전에서 첫 발자욱을 떼던 그 때, 그 날들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나는 북한에서 태어나고 자란 평양소년이었다. 지금은 서울시민으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서울사람이다. 평양에서 서울은 직선거리로 200km밖에 되지 않는다. 차로 불과 4시간이면 당도할 서울까지 내가 오는데 걸린 시간은 자그마치 1년 3개월, 중국과 라오스, 미얀마와 태국의 낯선 거리와 산야에서 이별의 아픔과 슬픔의 눈물을 삼키고 안전에 대한 불안으로 초긴장을 유지하며 견뎌내야만 했던 인고의 시간이었다. 사람다운 삶, 북보다 나은 삶을 갈구했던 나의 남행길은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감내해야만 했던 시련의 길이었다. 부모님과 동생들을 북쪽에 남겨두고 만남의 기약은 물론 내 자신의 생명조차 담보할 수 없는 고뇌와 번민 속에 어렵게 결심을 내렸다. 그 땅의 암울한 미래가 죽음을 무릎 쓴 일생일대의 용단을 내리도록 나를 불가항력의 힘으로 떠밀었다. 그때는 이산의 슬픔이 지금처럼 뼛속까지 절절하지 않았다. 머지않은 앞날에 통일도 되고 남한에서 열심히 살아 자랑스런 아들로 부모님과 동생들 앞에 나서게 되리라는 확신이 더 컸다. 하염없이 눈물 흘리시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뒤로 하고 나는 멀리 국경의 두만강 가의 어둠속에 내 운명을 던졌다. 그리고 중국에서 11개월, 동남아에서 4개월여의 시간을 거쳐 나는 그 나날들에 꿈에서도 그리고 소망하던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다. 평범한 공무원가정에서 태어나 상위권 성적으로 고등중학교를 마치고 김정일 경호부대에 입대해 노동당에 입당하고 군관도 되면서 북한에서 동년배의 남자들이 걸을 수 있었던 가장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생행로를 걷던 나를 남행길로 떠민 것은 미래와 희망이 없는 그 땅에 대한 회의와 절망이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난 나는 지금 서울에서 내 인생의 2막을 쓰고 있다. 

고향은 그리움이다. 내가 태어난 곳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곳이 바로 고향이다. 내 어린 시절의 추억과 사랑하는 부모님, 다정한 동생들과 내 청춘시절의 그 모든 것들이 바로 “고향”이라는 한마디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했던가. 아무런 연고도 없고 반세기 이상의 분단 속에 너무도 이질화된 남한에서의 생활은 처음부도 시련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고 배워야만 했다. 구한말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어느 날 서울 한 복판에 떨어진 “조선사람”, 아마도 이것이 남한사회정착 초기 탈북자들의 일반적 모습일 것이다. 제일 힘든 것이 선택이었다. 남한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과 상상 속에서 정형화된 이미지를 갖고 있어 현실과의 괴리는 더욱 컸다.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도 당해보고 억양이나 말투가 이상하다고 차별도 당해보았다. 취업도 진학도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경기도 가평의 깊은 산속에서 펜션, 민박 일도 해보고 전단지 아르바이트도 해보았다. 술도 마실 줄 몰라 상처는 속으로만 곪아갔다. 너무도 힘든 심리적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절망의 나락을 헤매기가 일쑤였다. 낙후되고 뒤떨어진 북한에서 온 탈북자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정착의 과정이었다. 몇 달간의 방황과 고뇌 속에서 나는 결심했다. 남한행은 내가 한 선택이고 나는 내 인생과 내 선택을 책임져야 했다. “너라도 그곳에 가서 꼭 성공하라”고 당부하시던 어머니 모습도 매일 밤 떠올랐다. 가슴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던 그 날들과 처음 겪었던 시행착오들이 내 인생의 2막을 꿋꿋이 버틸 수 있게 한 동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시 새로운 결심을 다졌다. 한국행, 남한에 도착한 그것으로 성공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들메를 다시 조여매고 새롭게 모든 것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아니던가? 

나는 낮에는 일을 하고 주말에는 탈북자들의 사회정착을 돕는 한 종교단체 교육기관을 찾아 원점에서부터 시작했다. 첫 걸음마를 떼는 아이의 심정으로 하나하나 차근차근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교육기관에서 장애인 재활시설인 “신망애”라는 곳에 봉사활동을 나가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장애인 하면 “병*”이라는 몹쓸 표현으로 대변되는 멸시와 천대의 대명사이다. 말로는 “인간중심”을 떠들지만 장애인들은 평양시에서도 살 수 없고 사회적인 편견과 차가운 시선에 노출되어 있다. 인권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과 박애사상이 부족한 데로부터 장애인에 대한 정부정책은 물론이고 사회적인 배려와 돌봄이 없어 북한의 장애인들은 이중삼중의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다. 남한에 와서 많은 것에 놀랐지만 그중의 하나가 바로 장애인들에 대한 국가정책의 수립과 실현, 사회적 배려였다. 지하철 계단에 장애인 휠체어가 드나들 수 있게 별도의 파이프를 설치되어 있었고 보도블록에도 시각장애인들이 잘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장애인들에 대한 국가적 혜택도 다양했다. 남한의 장애인들의 삶은 오히려 북한의 비장애인들의 삶보다 낫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장애인 재활시설은 과연 어떤 곳일까? 호기심과 설레는 마음으로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신망애” 복지재단을 찾았다. 시골의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신망애”는 “믿음과 소망, 사랑”을 모토로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장애인 재활시설로 많은 장애인들이 이곳에서 재활치료를 받고 있었다. 탈북봉사자들을 맞은 장애인들의 모습은 생각 이상으로 밝고 해맑았다. “신망애”의 장애인들과 대화의 시간도 갖고 함께 운동도 하고 식사도 같이 나누었다. 그리고 장애인들의 생활관과 이용시설 청소도 하고 한 명씩 맡아 목욕도 시켜드렸다. 장애인분들이 준비한 공연도 보면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너무도 짧게만 느껴졌다. 놀라왔던 것은 “신망애”의 이사장님도 장애인의 몸으로 피나는 노력 끝에 학위도 취득하고 재활시설 운영과 목회활동까지 벌이고 계신다는 사실이었다. 이사장님뿐 아니라 이 재활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 중에도 공부도 하고 음악도 하면서 꿈을 키워나가는 분들이 한 두 분이 아니었다. 이분들이야말로 육체적 장애는 있을지언정 정신적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는 비장애인들보다 오히려 더 인생을 사랑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셨다. 구김살 없는 장애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부끄러움을 금치 못했다. 나만 힘든 것처럼, 나만 외로운 것처럼 눈물 흘리고 세상을 원망하고 방황했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팔다리가 성치 않고 마음껏 활개 펴고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들도 이렇게 꿈을 잃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나는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던가. 이분들이 처한 상황에 비하면 내 어려움은 정말 엄살에 불과한 것이었다. 길지 않은 봉사활동이었지만 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비록 몸은 불편하지만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주어진 삶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장애인분들이 존경스러웠다. 병마와 장애의 고통 속에서 힘들어 하시는 분들도 계셨지만 그런 분들을 보면서도 느끼는 바가 컸다. 저 분들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 

무한대한 인간의 욕망은 어느 때부터인지 곁을 둘러보고 낮은 곳을 보는 눈보다는 위만 보는 시선을 더 당연시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세상을 둘러보고 주위를 돌아보면 나보다 더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하는 신세한탄이나 불평이 그분들에게는 사치이고 호사일 수도 있는 것이다. 두고 온 내 고향의 부모형제들과 많은 동포들도 지금 이 시각 굶고 있고 눈물 흘리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교만하기 그지없는 어설픈 “동정심”을 갖고 봉사활동을 갔던 장애인 재활시설에서 나는 오히려 많은 것을 얻어가지고 돌아왔다. 그곳에 계셨던 분들에게서 인생을 배우고 삶의 소중함과 감사하며 살 줄 아는 마음가짐을 말이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는 방황하지 않았다. 어려움과 외로움이 가신 것은 아니지만 바른 마음가짐, 긍정적인 마인드와 도전정신으로 학교도 나오고 지자체와 공공기관에서 열심히 일해 왔다. 고향을 떠나던 그 날의 초심, “신망애”에서 다졌던 그 날의 결심을 잊지 않고 나는 오늘도 내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인생의 2막을 살아가는 이곳에서 참된 삶의 소중함을 가르쳐주신 “신망애”에 계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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