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뉴스

한 평범한 20대 청년의 나눔 이야기

삼척시사회복지협의회 0 7,542 2013.01.21 11:13

부제 :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나, 그리고 당신 

장애아동 원영이를 만나기 전까지 저는 사회봉사란 남들보다 조금 더 여유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 혹은 조금 더 이타적이고 특별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올해로 스물일곱 살이 된 저는 또래의 친구들보다 더 여유 있지도, 남다르지도 않은 평범한 청년입니다. 사회봉사를 시작한 계기도, 경험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시간이 부족해서, 꾸준히 하지 못할까봐 ‘언젠가는 봉사를 다녀야지’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 제가 복지관으로 발걸음을 뗄 수 있었던 건,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서 였습니다. 봉사를 하고 싶어 하던 서로의 마음이 일치해 약속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저의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예전의 저처럼 지금 망설이는 누군가에게 평범한 당신도 봉사를 시작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 일은 지금 당신의 삶을 조금은 특별하게 바꿔줄 거라고 전해주고픈 마음에 저의 짧은 나눔 이야기를 적어 내려갑니다. 

무기력한 일상 속에 들어온 노란 조끼 

저는 학창시절까지 인구가 몇 십만 명 되지 않은 작은 해안가 지역에서 자랐습니다. 시골마을이 대개 그렇듯, 우리 동네도 어르신들의 비율이 높았지만 그분들을 위한 복지환경은 열악한 편이었습니다. 현실에서는 독거노인으로 근근한 살림을 하시며 끼니 관리가 어려우신 분들의 문제가 많았습니다. 요즘에는 도시락 배달을 통해 끼니를 제공받는 분들도 계시지만, 당시 제가 살던 곳에서는 혜택을 보는 어르신이 전무했습니다. 노인복지관을 통한 문화적 혜택도 수도권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미흡, 아니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어릴 적 할머니 손에 컸던 저는 어르신들과 어울리는 데 친숙한 편이었습니다. 고교 시절에는 시간을 내서 봉사한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주말, 방학 때 마다 양로원, 복지원, 마을회관 등을 방문하며 다양한 곳에서 3년 동안 120시간 가량을 봉사했습니다. 대학 입학 후 몇 년 뒤에야 봉사시간이 그만큼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알았을 만큼 봉사활동으로 무엇을 얻어 보겠다는 욕심은 없었습니다. 뉴스기사에서 부모가 대신 봉사활동을 다니며 자녀의 봉사시간을 채우고, 자녀는 그 시간을 인정받아 좋은 대학에 입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질은 외면한 채 이익을 위한 도구수단으로만 생각하는 마음가짐이라면 봉사활동 시간이란 것이 ‘진작 나도 그 시간으로 좋은 대학에 갈 걸’ 이란 개인의 욕심에 사로잡힐 정도로 달콤한 유혹으로 변질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때의 저에게 봉사활동은 ‘나를 희생하며 타인을 위한다’는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작은 도움과 말벗이 필요한 어르신들과 함께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즐겁던 시절이었습니다. 

건강상의 문제로 대학을 중퇴했지만, 운 좋게 다니던 대학의 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어, 넘치지는 않지만 부족할 것 없던 삶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매일매일 무기력하고, 외롭고, 혼자 멍하니 있는 날이 늘어만 갔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이 시기의 저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고교 시절까지의 저는 온데간데없이 좁은 시야에 갇혀 주변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병원 안에서 늘 마주칠 수밖에 없는 아픈 사람들을 봐도 아무 느낌 없던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노란색 조끼를 입은 봉사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봉사자들은 대부분 5, 60대 아주머니들로, 처음에는 그분들의 기운찬 모습에 눈길이 가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돌보아드리는 어르신들 때문에 힘에 부쳐 앓는 소리도 하는 것 같던데, 어느 새인가 다시 기운차게 봉사하시는 모습을 보다 보니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습니다. ‘여유 생기면 하지’, 하며 애써 외면하던 중 마음의 병은 점점 깊어져 갔고, 결국 고교 시절의 나처럼, 저분들처럼 봉사를 통해 다시 활기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솔직히 고백하자면 자기만족을 얻겠다는 마음으로 사회봉사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풋내기 봉사자, 원영이와 만나다 

저처럼 어느 단체 소속도 아니고, 아무런 정보도 없는 사회봉사 입문자에게는 봉사할 곳을 구하는 일조차 막막했습니다. 정보를 찾던 중 VMS사이트를 알게 되었고, 약속했던 친구와 함께 집 근처 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에 방문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봉사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어르신들을 돌본 경험도 있고 하여 처음에는 노인봉사 프로그램 쪽으로 문의를 했습니다. 이미 봉사자 인원이 꽉 찼을 뿐 아니라 저보다 연배 있으신 분들을 원하기 때문에 함께 일하기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아니, 봉사자들이 부족하다더니...봉사한다고 해도 할 데가 없다니.’ 이런 생각도 잠시, “대신에 장애아동을 가르치는 데에 손이 더 필요하니 장애아동을 도와주세요.” 하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잠시 멈칫하고 말았습니다. 장애아동들은 힘도 세고, 노인 분들보다 소통하는 데도 더 어려움이 많다고 익히 들어서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든 것입니다. 망설임 끝에 요청을 수락했고, 지적, 자폐장애 및 여타 불편을 겪는 발달장애 아이들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장애아동을 가르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잠깐만 앉아 있어도 아이들은 금세 지루해하며 소리치며 도망치곤 했고, 학습에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를 달래고 붙들다가 지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을 열지 않는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게 제일 힘들었습니다. 역시 봉사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싶으며 자괴감에 빠질 때쯤 한 아이가 먼저 다가왔습니다. 원영이 였습니다. 

지적장애 초등학교 5학년생 원영이는 항상 웃으며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부르며 다가와 서툴지만 따뜻한 말들을 건네주었습니다. 잠시라도 제가 안 보이면 울음을 터트릴 듯 큰소리로 찾는 아이에게 점점 애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원영이와 친해지자 다른 아이들과도 조금씩 마음을 터놓을 수 있었고, 서서히 참된 봉사의 즐거움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부터 늘 굳어 있던 저의 얼굴에 아이들은 웃음을, 눈물을, 살아 있는 표정을 되찾아주었습니다. 여전히 말을 안 듣고 떼를 쓸 때도 많았지만 인내심을 갖고 차근차근 아이의 말을 들어주며 이야기하면 시간은 걸리지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처음과 비교했을 때 저의 말솜씨가 더 늘은 것도, 특별한 요령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그저 조금 더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가르치며, 몸을 움직여 어울리게 된 것뿐입니다. 장애아들은 보통의 아이들과 분명 다르지만 전혀 다른 게 아니라는 사실. 일반인들 사이에도 나와 맞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듯이 모두와 친해질 수는 없어도 서로를 인격체로서 존중하며 대하면 교류가 이어지듯 장애인들과도 역시 똑같다는 평범한 진실. 그것을 원영이를 통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책을 읽고 대학을 다니고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배우지 못한, 사람을 대하는 마음. 그 마음을 장애아동들과 보낸 시간 속에서 배워나갔습니다. 

장애아동들과의 헤어짐, 그리고 새로 시작하는 봉사의 삶 

언제까지나 함께할 것만 같았던 아이들과의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복지관에서의 일정과 제게 주어진 시간이 맞지 않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든 아이들과 헤어지지 않으려 맞춰보려 했지만, 일을 그만둘 수도, 저 하나의 욕심으로 복지관에 폐를 끼치면서까지 일정을 조정할 수도 없었기에 결국 다른 봉사처를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원영아, 선생님은 당분간 못 올 것 같아.” 

헤어지는 날, 어렵게 꺼낸 말에 원영이가 갸웃거리며 “몇 밤 ?”이라고 묻는데 차마 언제 다시 오게 될지도, 못 올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원영이는 평소와 달리 늘 떠나지 않던 제 곁이 아닌 다른 선생님에게로 가서는 제가 복지관을 나오기 직전까지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에야 원영이는 다가왔습니다. “선생님, 담에 봐.” 그 말에 “응, 다음에 올게.”라는 무책임한 대답을 하고 돌아섰습니다. 그 후 한동안은 꾸준히 하지 못한다면 안 하는 것만 못한 것 아닌가 싶은 마음에 봉사를 망설였던 옛 기억이 떠오르며 사회봉사를 나간 걸 후회도 했습니다. 

다음 봉사처로 요양원에 나가면서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새로운 봉사의 길을 발견했습니다. 이곳에선 주로 노인 분들을 돕거나, 이와 관련된 행정업무를 도왔습니다. 그러면서 일반인 봉사자가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상황을 벗어나 봉사자와 피봉사자의 관계, 행정시스템 등을 아우르는 사회복지에 대한 전문적인 소양을 갖춰 이 일에 몰두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직장인 봉사자들을 위한 제도적 시스템 구축이나, 사회복지사들과 봉사자들 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최소화 시킬 수 있는 방법, 봉사자들이 일‧취미활동을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봉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시스템 마련 등에 개인적인 욕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1년 전부터, 저는 일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상경하여 다시 대학의 사회복지과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평생교육진흥원에서의 학점은행 사회복지전공을 통해 사회봉사의 기초를 배우고, 필수과목을 학습하여, 곧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받습니다. 또한 사회복지사가 복지서비스 이용자들과의 소통 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직업상담사도 준비, 곧 2차 시험을 보게 됩니다. 적지는 않은 나이에 안정적이던 일도 포기하고, 다시 대학을 가겠다는 결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주위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하며 저를 걱정합니다. 이런 제가 같이 봉사를 다니자고 권유하면 대개 손사래를 치며 ‘난 너처럼은 못한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함께 봉사를 나가자는 저의 권유는 모두가 복지전문가가 되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사회봉사활동을 경험한 뒤 이 길, 사회복지사가 되는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은 봉사의 의미와 중요성을 느껴서이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보지 못했던 삶의 길과 잃어버렸던 삶의 즐거움을 찾아서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처음 봉사를 시작할 때처럼 지금도 자기만족을 위해서 복지사의 길을 택한 것인가? 라는 물음을 해보곤 합니다. 사회봉사를 한다고 삶이 크게 달라질 거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예전의 저와 같이 외롭고 지친, 너무도 평범해서 더욱 힘든 누군가가 있다면 지금의 삶이 조금은 특별해질 수 있을 거라는 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불쑥 두렵고 지칠 때, 지체장애인 식사 봉사를 하면서 어르신들이 지어주시는 미소와 맛있게 드시는 모습과, 언젠가 원영이에게 “선생님이 왜 제일 좋아?” 라고 물었을 때 “선생님, 이뻐, 이뻐” 라는 답에 모두가 어이없지만 즐겁게 웃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힘을 냅니다. 저의 사회봉사경험은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피상적인 문장이 진짜 내 삶으로 뛰어 들어온, 평범한 삶의 가장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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